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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FE & CULTURE

[TRAVEL] 공구인 윤주훈의 알프스 마터호른 등정기

 

직장생활 40년차 공구인 윤주훈

 

알프스 마터호른 등정기

(Matterhorn 4,478m)

 

 

히말라야 등반이후 7년간 생각한 알프스


2017년 3월, 나는 알프스 산악회 회원들과 더불어 해발고도 5,550m의 히말라야 칼라파타라 봉우리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14박 15일의 일정동안 나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주변 사람들의 인연과 감사함을 느끼기도 했다. 내가 히말라야 칼라파타라를 등반 할 수 있었던 것은 가족과 더불어 다니고 있던 회사에서도 많은 배려를 해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17년 이후 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50대였던 나는 60대가 되었고 집과 회사를 오고가는 일상과 함께 틈틈이 산악회 회원들과 더불어 국내의 명산들을 등반했다. 그리고 산악회 회원들이 나를 산악회의 회장으로 추대해주면서 감사함과 함께 마음 한구석 숙제 같은 이름으로 있던 ‘알프스’라는 글자가 내게 왔다. 2017년 3월 히말라야 칼라파타라를 등반 하고 귀국한 이후 어쩌면 내가 하는 마지막 해외 등반은 알프스가 될 것이라는 생각을 잠깐 한 적이 있었다. 사실 산악인들에게 있어서 알프스는 어쩌면 너무나 당연히 등정하고 싶은 이름이다. 알프스에는 3대 북벽이 있다. ‘아이거(Eiger, 3,970m)’와 ‘그랑드 조라스(Grandes Jorasses, 4,208m)’ 그리고 ‘마터호른(Matterhorn, 4,478m)’이다. 

 


에베레스트 등정 이후 내가 알프스 등정을 고려한 것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내가 활동하고 지금 현재 회장으로 일하는 ‘한국 알프스 산악회’는 1962년 4월 19일 설립된 유서 깊은 산악회다. 80여명의 회원들이 전문등반 활동을 한다. 그런데 우리 ‘한국 알프스 산악회’는 알프스를 등반한 적 없다. 경상도의 ‘영남 알프스’만 자주 갔다. 알프스 산악회인데 알프스 한 번 못간 산악회. 그리고 그 산악회의 회장이 바로 나였다. 지난 17년간 산악회 활동을 하면서 쌓은 추억. 히말라야 등정 때 받은 산악회 회원들의 도움을 생각하니 알프스 못가 본 알프스 산악회라는 우리 산악회의 오명을 내 대에서 씻고 싶었다.

 

‘마터호른’요? 제가요? 왜요? 
좌충우돌 원정대 모집


등반은 끝없는 모험이고 모험은 상상력을 현실로 만들어 준다. 국내 등반은 현실 속 스포츠로 여겨지지만 국외 등반 원정은 진짜 모험이자 상상의 영역이다. 그리고 그런 상상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것이 있으니 바로 ‘돈’이다. 국외 등반 원정대를 꾸리는 것에는 큰 비용이 발생한다. 왕복 비행기 값, 체류비, 등반비, 식비, 로프나 자일과 같은 장비, 장비 운반비 등 집 떠나 산에서 자면 돈이 많이 든다. 거기다 대부분 직장인의 삶을 살아가는 산악회 회원들이 9박 10일 동안 알프스 등반을 하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과 가족의 허락을 받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 가까운 지인들은 물론 가족에 이르기까지 알프스 등반 설득 과정에서 응원과 더불어 꼭 ‘스위스’가고 싶냐는 말을 듣는다. ‘스위스’가 아니라 ‘알프스’ 간다고! ‘알프스’ 중에서 ‘마터호른’ 간다고! 라고 외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제 60대로 접어든 나는 아내 앞에 서서 아주 공손하고 간절하게 부탁을 했다. 그리고 긴 시간 설득과 호통, 땡깡과 헌신, 애원과 눈물(?) 끝에 허락 아닌 무언의 허가를 얻었다. 함께 ‘마터호른’을 가기로 한 원정대 대원들도 가족이 있고 직장이 있기에 알프스에서 등반에 필요한 일주일의 시간과 경비를 가까스로 마련했다고. 참고로 이번 등반에는 1인당 500만원 이상의 비용이 사용되었다. 전문 산악인이라면 대기업의 후원을 받는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회인 동아리 모임과 비슷한 산악회에서 기업의 스폰서를 구하는 것은 영화 같은 일이다. 결국 참여 할 수 있는 8명의 원정대를 꾸리는 것에만 2년의 시간이 걸렸다. 

 


지구 반바퀴 돌고 경유해 드디어 알프스

 


2024년 8월 2일 금요일 인천국제공항. ‘한국 알프스 산악회’ 마터호른 등반 원정대 8인이 모두 모였다. 원정대장인 나 ‘윤주훈’을 중심으로 ‘류현’, ‘정옥렬’, ‘오세훈’, ‘우제민’, ‘박채규’, ‘이재하’, ‘허욱’, 총 8인이 모인 것. 원정대 멤버 중 허욱씨는 1980년 알프스 3대 북벽 등정에 성공한 실력자이자 이번 원정대의 인도자였다. 대한민국 인천을 출발해 두바이 국제공항을 경유, 스위스 제네바 국제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차량을 이동해 곧바로 프랑스 샤모니(Chamonix) 지역으로 넘어 갔다. 샤모니는 프랑스의 작은 소도시지만 1924년에 제1회 동계올림픽이 개최된 곳으로 유럽인들에게는 익숙한 곳이다. 한국에는 얼마 전 예능 <텐트 밖은 유럽>에 등장하면서 무척 유명해졌다. 알프스 산맥 자락에 위치한 샤모니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보통 스위스 제네바에서 넘어오거나 파리 혹은 리옹에서 들리는 경우가 많다. 샤모니의 호텔 숙소에 도착 후 자유시간을 가지면서 나는 드디어 알프스에 온 것을 실감 할 수 있었다. 

 


유럽 최고봉 전망대에서 바라본 몽블랑 

 


샤모니 인근에는 알프스 최고봉 몽블랑과 빙하를 볼 수 있다고 한다. 8월 4일 우리는 날이 밝자 마자 케이블카를 통해 단숨에 3,842m에 위치한 에귀디미디(Aiguille du Midi) 전망대에 올라갔다. 에귀디미디 전망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면서 알프스 최고봉인 4,807m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1955년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알프스를 손쉽게 오를 수 있도록 만든 우수한 기반 시설과 더불어 알프스의 압도적인 풍경은 나를 전율하게 만들었다. 에귀디미디 전망대에서는 프랑스 샤모니와 함께 이탈리아의 영토가 보인다. 동시에 갑자기 달라진 기온에 한 여름에 두꺼운 옷을 찾게 만들었다. 알프스 산맥하면 스위스가 떠오른다. 하지만 알프스 산맥은 프랑스와 모나코서부터 시작해 이탈리아,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슬로베니아, 총 8개국에 걸쳐 위치해 있다. 에귀디미디 전망대에서 우리는 ‘코스믹-리지’ 등반을 시작했다. 코스믹-리지는 에귀디미디에서 설원지대를 가로질러 코스믹 산장으로 향한 후 산장쪽에서 위귀디미디로 이어지는 등반 코스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해발 3,800미터 풍경은 마치 우주 저 멀리 다른 행성에 있는 듯 했다. 우리는 본격적인 마터호른 등반을 대비해 준비운동 삼아 실시한 고지대 등반을 마치고 샤모니 숙소로 다시 돌아왔다. 모두 피곤해 하면서도 활기가 넘치고 너도 나도 아름다운 풍경에 대한 이야기로 끝이 없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해발 3,800미터 풍경은 마치 우주 저 멀리 다른 행성에 있는 듯 했다.

 

에귀디미디 전망대는 유럽에서 가장 높은 전망대이면서 알프스 최고봉인 4,807m 몽블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그랑드 죠라스’의 압도하는 풍광을 보며 다음날 마터호른 등정을 기대했다.

 

몽탕베르에 가기 위해서는 작고 빨간 산악기차를 타야한다.(좌)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드류(우)

 

 


알프스 빙하의 흔적 보며 ‘그랑드 조라스’ 전망


  

 

다음날 8월 5일 우리는 샤모니에서 산악기차를 타고 ‘몽탕베르(Montenvers)’역으로 향했다. ‘메르 데 글라스(Mer de Glace)’ 빙하 위를 걸으며 ‘드류(Petit Dru, 3,733m)’, ‘그랑드 조라스(Grandes Jorasses, 4,208)’북벽을 조망하기 위해서다. 샤모니에서 산악기차로 20분 거리 정도에 위치해 있는 몽탕베르에 가기 위해서는 작고 빨간 산악기차를 타야한다. 이 산악기차는 1909년 처음 운행을 시작한 유서 깊은 산악열차다. 몽탕베르는 고도 1,913m에 위치한 신비로운 빙하 바다 ‘메르 데 글라스’를 간직하고 있는 지역이다. 동시에 이곳에 도착하면 샤모니를 내려다보는 위압적인 자태의 산봉우리 드류를 볼 수 있다. 깎아지른 듯 우뚝 솟은 드류를 보면서 나는 등반에 대한 욕구가 솟아올랐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알프스의 봉우리들을 양옆으로 도열해 놓고 빙하 ‘메르 데 글라스’위를 걷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웬걸.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로 빙하는 다 녹아 그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그랑드 죠라스’는 조망 할 수 있었다.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1,200m의 수직 암벽 ‘그랑드 죠라스’는 알프스가 가진 보물이다. 그랑드 죠라스 북쪽 사면은 알프스 3대 북벽 중 하나다. 3대 북벽의 등반 난이도는 매우 높다. 이곳을 등반 하다가 사망하는 전문 산악인들은 지금도 많다. 산이 높다고 등반이 어려운 것이 아니다. 등반 각도 및 날씨, 바람 등 여러 가지 사항으로 모든 산악인이 두려움과 존경의 뜻을 담아 부르는 곳이 알프스 3대 북벽이다. 우리는 ‘그랑드 죠라스’의 압도하는 풍광을 보며 다음날 마터호른 등정을 기대했다. 

 

프랑스 샤모니에서 출발해 스위스 테쉬역에 도착했다.

 

마터호른 향해 이동하며 고산증세로 위기

 


8월 6일 아침 우리는 프랑스 샤모니에서 출발해 스위스 테쉬(Tasch)역에 도착했다. 테쉬역에서 체르마트(Zermatt)까지는 전철을 타고 체르마트에서 슈바르제(Schwarzsee)까지는 파라다이스 케이블카를 이용해 이동했다. 슈바르제에서 해발 3,260m 훼르니산장(Hörnli Hut)까지 대략 3시간 동안 산행을 했는데, 이 모든 것이 오직 다음날 마터호른 정상 등반을 위한 이동이었다. 그런데 훼르니산장까지의 등반을 하면서 나는 고산증세를 느끼기 시작했다. 고산병은 순화과정 없이 고도가 낮은 곳에서 해발 3,000m 이상 되는 고지대로 갑자기 올라갔을 때 산소가 부족하여 나타나는 증상이다. 해발 고도 3,000m 이상의 산에 오를 때 원정대를 꾸리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고산병 때문이다. 저산소증으로 인하여 판단이 흐려질 수 있는데 무리해서 올라가다 증상을 느껴도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운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원정대 대장으로서 간절히 원하던 마터호른에 가는데 힘들어도 힘들다는 내색을 하기가 어려웠다. 8월이지만 기온은 영하에 가까워 두꺼운 파카를 입어야 했고 천근만근의 몸을 이끌고 원정대 모두 힘에 겨워 말없이 등반을 했다. 너무 힘이 들어서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 순간이 있다. 무념무상의 순간. 그러게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다 보니 훼르니산장에 도착했다. 멀리서 보이던 마터호른의 모습이 가까이 보이고 그 모습이 아주 위협적으로 보인다. 과연 내가 마터호른 정상을 찍을 수 있을까? 주변 원정대 대원들의 얼굴을 보니 저마다 지쳐있는 모습이다. 샤모니에서 훼르니산장까지 이동하다보니 날은 이미 어둑어둑해 있었다. 여기까지 오기위해 우리는 버스와 전철, 케이블카를 비롯해 도보로 고산지대를 이동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소모했다. 다음날 마터호른 정상을 등정하기 위해 나를 비롯한 원정대 일행 모두는 일찍 잠에 들었다.   

 

 

마터호른 정복 위해 두 개로 찢어진 원정대 

 


 

마터호른은 해발 4,478m이며,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보다 300m낮다. 그런데 몽블랑보다 늦게 정복되었다. 그만큼 정상 정복이 어려우며 산이 가파르기 때문이다. 에베레스트에 비하면 높이가 절반 수준이지만 등산 중 사망자는 에베레스트의 두 배정도다. 에베레스트의 경우 현재까지 290여명 가량이 등산 중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마터호른의 경우 지금까지 약 500여명이 사망했다. 지금도 매년 사건 사고, 사망 사고가 발생하는 곳이다. 1865년 7월 14일에 영국인 탐험가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 1840~1911)가 원정대를 꾸려 마터호른 정상에 도달했지만 하산 도중 실족 사고로 7명의 원정대 중 4명이 사망했다. 올해 4월에도 마터호른 산사태로 미국인 3명이 사망했다. 그만큼 마터호른 등반은 위험하다. 
8월 7일 새벽 4시. 잠에서 깬 나는 원정대원들과 함께 마터호른 정상 등반을 시작했다. 새벽 4시에 훼르니산장에서 출발해 오전 9시에 솔베이산장(Solvay Hut)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고산증세가 있어도 내색하지 않고 걷는데 주변을 보니 모두 중년의 아저씨들이라 그런지 속도를 못 내고 있었다. 모두가 고산증세로 숙면하지 못하고 등반의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두통, 어지러움, 비현실감이 몸을 천근만근으로 만들고 있었다. 4,003미터에 자리에 위치한 솔베이산장까지 도달하니 오후 2시. 헛간 같은 솔베이 산장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며 나는 원정대 대원들을 돌아봤다. 대부분이 지쳤고 나는 원정대 모두가 정상에 도달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후 2시 지금 출발 하더라도 마터호른 정상을 찍으면 하산이 어려울 수 있었다. 이제는 원정대 대장으로서 결정을 해야 했다.
“지금부터 제가 호명하는 두 사람만 마터호른 정상에 도전하고 나머지는 하산합니다.” 

 

솔베이 산장은 4,003미터에 자리해 있으며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산장으로 알려져 있다.


안전한 등반 성공 이후 알프스 풍광 눈에 들어와

 


솔베이 산장은 마테호른 북동쪽 능선에 위치한 산장이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산장으로도 유명하다. 이곳은 출입문을 열고 두 걸음만 걸으면 절벽을 마주한다. 출입문에서 두 걸음 더 내딛으면 사망하는 곳이다. 솔베이 산장에서 나는 2명 우제민, 정옥렬 두 사람에게 마터호른 등반 후 솔베이 산장에서 하루를 자고 아침에 하산을 부탁했다. 두 사람이 가장 등반기술이 좋고 체력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고 정산 등반을 도전하고 싶지 않겠는가.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어도 어쩔 수 없이 그 욕망을 채우지 못할 때가 있다. 노력한다고 모든 것이 되는 것이 아니다.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도 있다. 나의 한계를 확인하는 것. 오만한 나를 내려놓고 자연 앞에서 너도 나도 한낱 피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등반에서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등반을 하는 것이 아닐까. 또 내가 하지 못해도 나를 대신해 같은 원정대 대원들에게 정상 등반을 부탁하고 나는 남은 인원들과 함께 하산을 시작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대원들과 함께 나 역시도 마음을 추스르며 내려와 체르마트에 마련한 캠핑장에 도착했다. 캠핑장에서 텐트를 빌려 야영을 하면서 저 멀리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두 대원들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렇게 다음날이 되자 무전기에서 간절히 원했던 소식이 들렸다.

 

마터호른 정상 등반 성공한 후 알프스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등반 성공. 등정 성공. 하산하겠음.”  
그리고 몇 시간 뒤 정상 등정을 성공한 두 대원이 캠핑장에 나타났을 때 우리 모두는 얼싸안고 기쁨을 누렸다. 원정대 모두가 등반에 성공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원정대 일부라도 등반에 성공했기에 우리의 원정 목정은 달성 되었다. 산악회의 회장으로서 행복감과 성취감, 뿌듯함과 안도감이 몰려왔다. 이제 우리는 알프스 정상 등반에 성공한 ‘한국 알프스 산악회‘가 된 것이다. 그때서야 알프스의 아름다운 전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몇 년 동안 가슴에 담아두었던 체증이 쓸려나가는 그 기분. 그 기분 속에서 내 눈에 들어온 알프스는 아름다웠다. 돈과 시간을 쓰면서 원하는 것을 이루기까지 내게 많은 것을 배려해준 사람들이 있다. 아내, 가족, 직장 동료들 모두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60대가 되었다고 포기란 없다. 평균 연령 50대 중반의 철없는 남자들의 무모한 도전에는 의미가 있다. 공구인들 모두 나처럼 원하는 꿈 이루시길 응원한다. 꿈은 이루어진다.

 

내가 마터호른을 등반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변 직장 동료들의 도움도 컸다.
 

글·사진 _ 윤주훈 책임 CRETEC 서울 마케팅 5, 6팀 / 정리 _ 한상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