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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상탐방

충북 청주 한국볼트상사

 

태권도 잘 한 우리 아들들 사업은 더욱 잘할 것

 

충북 청주 한국볼트상사 최규진 대표 두 아들 최승명, 최승록

 

 

 

 

한국볼트상사 최규진 대표는 20여 년간 태권도 선수 생활을 하다 최근 사업을 시작한 두 아들에게 ‘너희가 태권도 하면서 했던 노력 절반만 해도 사업은 성공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만큼이나 최선을 다해 끝까지 노력해 본 경험이 있는 두 아들이, 대표는 자랑스럽다.

 

다섯 살, 세 살 때 태권도 시작… 전국대회 금메달도 수차례 획득


세상에 태어난 어떤 사람이든 자기만의 특기와 장점을 갖고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어떤 특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것을 잘 하는지 진작부터 알아차리는 것. 보통 그런 것은 자신보다는 부모가 먼저 알아차리게 되거나 또는 부모의 선택으로부터 발현되곤 한다. 충청북도 청주시 한국볼트상사 최규진 대표는 두 아들에게 태권도를 선택해 줬다. 


“지금은 청주에 공구거리가 세 곳 있지만 저희가 어릴 때만 해도 아버지 가게 있는 서문공구거리 한 군데밖에 없었거든요. 사람들 빽빽한데 아이들 놀 곳은 없었어요. 놀이터 없으니까 체육관 가서 놀아라, 하셔서 태권도를 시작하게 된 거였죠.”


두 형제는 아버지가 선택한 선택지로부터 자신들이 갖고 태어난 능력을 물씬 발휘해 냈다. 중학교 태권도팀을 거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학교 대표 태권도팀 선수로 활약한 두 아들들. 2004년에 있었던 제39회 대통령기 전국단체대항 태권도대회에서 형 최승명은 페더급 금메달을, 동생 최승록은 플라이급 은메달을 획득하며 형제 동반 메달 획득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어진 2005년 제86회 전국체전에서도 형은 금메달, 동생은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당시 대학4학년(형), 대학2학년(동생) 시절이었다.
“형은 대학 시절 대회 전관왕이었어요. 한 해에 시합 다섯 개 있으면 다섯 개 전부 금메달. 저는 결승만 가면 이상하게 긴장되더라고요.”

 

2004년 전국 대통령기 태권도대회에서 금메달과 은메달을 딴 형제. 당시 신문에 날 만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세계 여러 나라 태권도팀 코치 역임…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 감독도


대학을 졸업하고 형제는 실업팀 프로 선수로 진출했다. 형 최승명은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최고의 태권도 실업팀이라 불리는 한국가스공사 태권도팀 선수로(국가대표 이대훈 선수도 한국가스공사 출신이다), 동생 최승록은 도민체전 십여 차례 우승을 자랑하는 충청북도 진천군청 태권도팀 선수로 진출해 역시 뛰어난 실력을 뽐냈다. 그렇게 실업팀에서 활약하며 동시에 대학원까지 졸업한 형제는 이후 각자의 역량을 발휘해 세계 각국의 국가대표 태권도팀 코치를 역임했다. 형은 인도네시아, 동생은 튀니지와 베트남 태권도팀 코치로 활약했다. 그 후 형 최승명은 사우디아라비아 국가대표 태권도팀 감독 제의를 받아 2년간 감독 생활을 하기도 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태권도협회만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유도 협회, 가라데 협회까지 하나로 뭉쳐 있거든요. 그래서 예산도 나눠 가져야 하고 그러다 보니 예산 따기가 힘들더라고요.”
적은 예산 탓에 체급별 정원도 다 채우지 못한 상황에서 출전했던 태권도 걸프 대회(중동국가대회)에서 최승명이 감독을 맡은 사우디아라비아 태권도팀은 역시나 금메달을 획득했다.

 

큰아들의 매장 자티컴퍼니에서 사이좋게 서 있는 세 가족(좌측부터 둘째아들 최승록, 최규진 대표, 큰아들 최승명 대표)


자리 지키려는 기득권 탓에 펼치지 못한 태권도 지도자의 꿈


지도자로서 획득한 대회에서의 금메달과 적지 않은 연봉.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먼 타국에서의 생활이 쉽지 않았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보수적인 이슬람 율법이 중동 국가들 가운데서도 가장 강해 생활에서의 답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지쳐 있던 와중 한국으로부터 자리가 생길 것 같다는 연락이 와 형 최승명은 한국으로 돌아왔다. 연봉을 한참이나 높여 주겠다는 사우디의 잔류 요청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그렇게 귀국한 한국이었지만 정작 돌아온 말은 기다리라는 말 뿐이었다.
“제 꿈은 태권도로 성공을 해서 학교에서 지도자 생활을 하다가 공부를 더 해서 교수가 되는 거였거든요. 그래서 돌아왔는데 환영해주는 사람이 없는 거예요. 청주라는 동네가 좁고 팀도 몇 곳 없으니까 이미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 밥그릇 뺏길 걱정만 하는 거죠.”
수년을 기다리다 지친 그는 이렇게만 있다간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태권도라는 둥지를 박차고 나와야만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나갈 수 있겠다는 결심으로 긴 여행을 계획했다. 과거 수년간 코치 생활을 했던 인도네시아로의 여행을.

 

인도네시아 현지에서 목재 검수를 마친 뒤 트럭에 싣고 있는 최승명 자티컴퍼니 대표.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티크목재의 모습. 견고하고 습기에 강해 뒤틀림이 적은 티크나무는 건축, 선박의 재료로 많이 사용된다.

 

새로 설정한 인생의 방향… 인도네시아 목재 수입 유통업


오래 살았고 그러다 보니 언어도 어느 정도 할 줄 알고 또 좋았던 기억이 있는 인도네시아에는 친하게 지냈던 현지 친구들이 있었다. 친구들을 만나 처음에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려고’ 하며 말을 건넸고 사업을 하고 있던 현지 친구들은 그에게 인도네시아의 특산품인 목재 수입 유통을 권했다. 진지하게 검토한 형은 가족들에게 사업의 뜻을 밝혔고 아버지는 적극 권했다.
“큰 아들이든 작은 아들이든 태권도 하면서 죽을 만큼 노력한 걸 알거든요.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너희가 태권도 하면서 했던 노력의 절반만 해도 사업을 성공할 거라고요.”
형 최승명은 인도네시아 대학교(University of Indonesia)에서 1년 동안 언어 교육 코스를 밟으며 사무적 대화법과 동남아의 예의 있게 대화하는 방법 등을 익혔다. 그러면서 주말에는 인도네시아 각지의 목재 공장에 미팅 메일을 보내 거래처를 뚫었다. 유학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는 이미 사업을 시작할 만한 커다란 경험을 쌓은 상태였다. 이후 ‘자티컴퍼니’라는 이름으로 사업자를 냈다. ‘자티’는 인도네시아의 대표 수종인 티크나무를 의미한다.
자티컴퍼니는 2017년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현재 최승명 대표가 제작해 유통하는 인도네시아 원목을 가공한 테이블 및 인테리어 제품들은 전국의 가정과 카페 등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티컴퍼니에서 제작한 티크고재가 적용된 카페의 천장 모습.
 

목재 유통하는 형 아버지 사업 물려받을 동생


인생의 새로운 방향을 인도네시아 목재 수입 유통업으로 정한 형과 달리 동생 최승록 씨는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 하기로 방향을 설정했다. 10년 전, 베트남 코치 생활을 마치고 우리나라로 귀국하던 바로 그 날부터 아버지 가게에서 일을 시작했다.
“주변에서는 계속 운동 하지 왜 가게 일을 하려 하냐, 하는 말들을 많이 하세요. 그런데 이 가게는 아버지의 자존심이거든요. 저희 형제 중 누군가는 이 가게를 꼭 지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형은 자기 사업 하니까 저밖에 없잖아요. 저는 앞으로 부모님 위해서라도 가게를 좀 더 키우고 활성화할 생각이에요.”
형 최승명과 동생 최승록은 둘 모두, 지금껏 자신들의 교육과 생활 뒷바라지에 고생해 오신 부모님의 모습을 마음 속 깊이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말한다, 자랑할 사람은 자기들이 아니라 아버지라고. 형 최승명은 자기 인생의 목표를 ‘아버지 반만큼만 살자’라고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너무나 큰 산 같은 사람이라서 아버지만큼 살기는 절대 불가능할 것이라며.
아버지는 아들들을 자랑하고, 아들들은 아버지를 자랑하는 한국볼트상사는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공구상 가족이 아닐까.

 

글·사진 _ 이대훈